[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Ⅲ-공생원 윤학자①]모두가 윤학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빚쟁이 신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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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목포를 사랑한 사람들 7인의 이야기Ⅲ-공생원 윤학자①]모두가 윤학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빚쟁이 신세가 됐다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2.08.09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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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부터 23년, 모두 30여년 세월 고아 어머니로 일평생 살아
본명 “다우치 치즈코” 1919년 3월, 총독부 부친 딸 목포에 이주
윤치호 운영하는 공생원서 일본어 음악 가르치는 교사로 근무 시작

본지는 지역주의타파범국민실천위원회 배종덕 위원장이 집필한 목포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란 주제로 연재한다. 이번 연재는 배 위원장이 출간한 책에서 저자가 직접 작성한 글로서 61일 발행되는 신문부터 독자를 찾아간다. 30회에 걸쳐 보도될 이번 연재는 일곱 분의 인사 중 첫 번째 순서로 종교 정치분야로 이남규 목사 편이 총 4~5회에 보도된다. 두 번째는 행정분야의 하동현 전) 목포시장, 사회복지분야 윤학자 여사, 산업경제분야 임광행 회장, 문화예술분야 차재석 전)목포예총지부장, 사회봉사분야 박길수 씨, 사회봉사분야 김환 전 백년회 이사장 순으로 보도될 예정이다.<편집자 주>

 

7인의 휴먼다큐 목포를 사랑한 사람들-공생원 윤학자 여사

윤 학 자(1912 ~ 1968)

19681031, 한반도의 최남단 항구도시 목포의 날씨는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바다와 하늘이 모두 푸르렀다. 낮 평균 기온은 15(섭씨)였으며 구름 한 점 없는 온화한 가을 날씨였다. 밤이 되자 유달산 상공의 성근 별들이 산 밑 대반동에 자리한 고아의 성지 공생원을 향해 반짝이기 시작하였다.

성근별들 사이로 갑자기 광명한 별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윤학자가 별이 된 것이다. 사랑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틀이 지났다. 1968112, 오전 11, 목포역 광장에는 큰 장이 섰다. 4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큰 장이었다.

1926년 목포개항 30년과 조선면화재배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남물산공진회와 조선면화공진회가 공동으로 마련했던 큰 장 이래 42년 만에 개항 이래 두 번째로 큰 장이 선 것이다. 일순간에 4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큰 장이었다.

 

최초의 시민장

일순간에 4만여명의 목포시민이 모인 이 큰 장은 무슨 장이었을까? 도대체 무슨 까닭에 일순간에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모여 큰 장을 펼쳤을까?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는 최초의 시민장이었다. 1926년의 목포시민들이 마련한 목포의 첫 번째 장이 희망과 기쁨의 장이었다면 1968년의 두 번째 장은 좌절과 슬픔의 장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당시의 시민장 모습이다. “목포를 울린 장례, 3만 조객 흐느낌을 받으며 고아의 어머니윤학자 여사 떠나시다...”(목포개항 백년사”, p.384)117일자,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어머니는 바보야”, p.165, 윤기, 윤문지 지음)이라고 보도하였다. 전국에 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조선일보가 머리기사로 보도를 한 것을 보면 이날의 시민장을 목포시민 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분들이 윤학자의 소천을 아쉬워하고 애도를 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33년이 지난 200110, 일본의 유력 신문인 산케이신문은 윤학자의 삶을 조명하면서 이때의 시민장을 한.일 국경을 넘어 양국에서 매우 큰 울림을 준 감동적인 사건이었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이날의 시민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목포시민을 좌절과 슬픔에 빠뜨리고, 56세의 나이에 홀연히 하늘의 별이 된 윤학자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삶을 살았기에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 주인공이 되었을까?

두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시민장과 윤학자의 족적에 대한 조망을 통해 찾아보자.

윤학자 윤치호 부부의 결혼사진

시민장의 의미

시민장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목포시 보다 먼저 시민장을 치른 적이 있는 광주시의 시민장을 통해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광주시가 치른 최초의 시민장은 1934, 일제강점기시기에 치른 독일계 미국인 간호 선교사 쉐핑”(Elizabeth J. Shepping, 1880~1934)(쉐핑(Elizabeth J. Shepping, 미국 1880~1934))의 장례식이 최초다. 쉐핑은 광주에서 한센 병 환자들과 고아, 그리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을 위해 22년간 헌신 봉사하였다.

1934,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쉐핑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일한 재산이었던 두 홉의 밀가루와 자신의 시신을 유산으로 남겼다. 시신은 해부용으로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러한 연유로, 광주시민들은 쉐핑을 나환자의 어머니라고 불렀으며 그녀의 헌신에 대한 보답으로 광주시 최초의 시민장으로 그녀를 예우하였다. 광주시 최초의 시민장을 통해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이 갖는 숭고한 의미를 반추하여 보았다.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의 주인공인 윤학자에게로 돌아가 보자.

 

목포사람들을 빚쟁이로 만든 여인

목포를 비롯한 섬 지역 신안, 그리고 인근의 무안, 해남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삶이 그렇게 풍족한 편이 아니다. 더욱, 윤학자가 살았던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시기, 그리고 60년대 중반까지는 정말로 힘든 시기였다. 가가호호가 입에 풀칠하기도 쉽지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 시기는 필설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엄혹한 시기였다.

가정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두 집 건너 한집이 자식들을 건사할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가장 큰 슬픔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연약한 어린 아이들이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 버려진 아이들아 목포인근지역에는 지천에 깔릴 정도로 넘쳐났다. 세칭, 거지와 고아들이 거리에 넘쳐 났다. 목포와 인근지역 주민들이 자의든 타의든 부모로써의 자식에 대한 최소한의 부양과 양육의무를 방기하였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거리에 넘쳐 나는 고아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 줄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 천지에는 없었다. “빈민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이 현실이었다. 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오로지 거지대장 윤치호와 그의 일본인 부인이 운영하던 목포시 죽교동(대반동)에 소재한 공생원 밖에는 없었다. 이러한 비참한 시기에 윤학자는 일제강점기 8, 그리고 광복이후 소천하기까지 23, 모두 30여년의 세월을 세칭 고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며 살았다. 목포와 인근지역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을 윤학자가 대신 한 것이다. 아무런 조건이나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한 것이다. 목포시와 인근지역의 부모들은 물론이고 지역공동체 모두가 윤학자에게 빚을 지게 된 셈이다. 모두가 윤학자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빚쟁이 신세가 된 것이다. 따라서 윤학자는 본의 아니게 이들에게 부채를 안겨준 셈이며 이들 모두를 빚쟁이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윤학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들에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받을 빚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세상을 떠났다. 윤학자는 그저 하나님이 보내신 항구의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다.

 

다우치 치즈코 시절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명기 1429-

윤학자, 세상을 떠난 후에 그녀를 일컫는 이름은 많다. 고아의 어머니, 목포의 어머니, 바보엄마, 갯가의 성녀.... 윤학자의 본명은 다우치 치즈코이다. 일본인으로 1912, 아버지 다우치 도쿠치와 어머니 하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치즈코는 일본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사카모토 료마”(사카모토 료마(일본. 1835.01.05~1867.12.01. 정치인. 시코쿠남부 고치현출생))가 태어난 시코쿠지방의 고치시 와카마쯔마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다우치 도쿠치가 총독부 관리로 목포에 나가 있는 동안 7살까지 아버지와 떨어져 어머니 하루와 고치에서 살았다. “다우치 치즈코19193, 아버지가 총독부 관리로 근무하고 있던 한반도 남단, 항구 목포(1897년 개항됨)에 첫발을 디뎠다. 그때 그녀의 나이 7세였다. 목포에 정착한 치즈코는 부모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고녀에 진학한다. 고녀 시절에는 어머니 하루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졸업 후에는 일본인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치즈코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집안에 변고가 생겼다. 아버지 도구치가 돌아가신 것이다. 이때부터 집안 살림은 어머니 하루의 몫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 하루가 조산원 자격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산원 개업을 하게 되고 그런대로 큰 고생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1930, “치즈코는 당시 목포에서 유일한 조선인 여자중등교육기관인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교편생활을 시작한다. 정명여학교는 치즈코에게는 잘 맞는 직장이었다. 특히 아침 조회 시에 드리는 예배와 성경강의가 맘에 들었다. 뿐만 아니라 치즈코가 일본인이었지만 학생들과 관계가 좋아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 신자로써 언제나 학생들 편에 서서 이해하려는 치즈코의 태도를 학생들이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명여학교에서 교사 생활도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정명여학교 재직 3년째 되던 해에 원치 않는 병마가 찾아 온 것이다. 어느 날 수업 중 갑자기 하복부에 통증이 오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자궁내 종양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좌우 두 개의 난소중 하나를 제거해야 할 중병이었다. 운이 나쁘면 임신을 할 수 없는 불행한 결과가 나올 수 있는 판국이었다. 의사의 권고대로 종양이 있는 한쪽 난소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되었다. 그러나 회복하는데 무려 6개월이나 걸렸다. 6개월 동안 병상에 있으면서 치즈코는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에게 저의 목숨을 걸만큼 가치 있는 일을 주시옵소서...” “치즈코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는지 6개월간의 요양 끝에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일상을 되찾은 치즈코는 맨 먼저 은사이자 멘토인 다카오선생 부부를 뵈러 선생 댁에 들렀다. 이 자리에서 다카오선생으로부터 거지대장 윤치호윤치호가 운영하고 있는 공생원”, 그리고 고아원 원생들에게 일본어와 음악을 가르칠 교사의 추천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음악이든 무용이든 무엇이든 좋으니까 아이들 얼굴에서 웃음이 들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다카오선생의 간곡한 권유를 들은 치즈코저는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이 병마로부터 회복 된다면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아름다운 유산”, p.114, 정훈편저)자신이 서원하였던 기도 내용을 말씀 드리면서 다카오 선생의 제안에 승낙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다카오선생과 공생원 방문일시를 결정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치즈코는 어머니 하루에게 다카오선생과의 약속, 그리고 윤치호공생원에 관한 얘기를 밤늦도록 나눴다.

/다음 호에 이어짐

-약력

목포 중.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 / MBC PD / 에스콤 대표이사/ 제일기획(삼성그룹) 기획국장 / 통일민주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 목포시지구당위원장 / 지역주의타파 범국민실천위원장 / 저서 나는 일하고 싶다’‘매향노라 불리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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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2022-08-15 13:09:15
'배종덕후배님 귀한 자료 고맙게 읽었습니다.
저는 44년 9월29일생 으로 북교48회, 목포중14회, 고 12회 졸업후 63학번으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 졸업후 효성TNC(동양나일론) 23년, INERGY AUTOMOTIVE SYSTEMS(프랑스 Plastic Omnium출자한 다국적기업)에서 연구소장과 품질보증 임원으로 18년근무 했습니다. 초등학교시절 양동교회에서 초등부 주일예배를 친구들과 함께 드렸던 추억이 있어서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면 북교교정과 양동교회 예배당을 찾아가 혼자 예배드리고 옵니다. 배종덕후배께 귀한 자료집필과 기고의 노력에 깊이 감사하며 힘찬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주안에서 건강하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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